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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칼럼] 태종 이방원을 통해 본 효와 사랑의 크기

dukkyun 2022. 5. 3. 08:33

김덕균 한국효문화진흥원 효문화연구단장

[금강일보] 하늘의 왕자 독수리는 까마득한 바위 절벽에 둥지를 틀고 새끼들이 날기 전까지는 절벽 둥지에서 며칠씩 굶기고 저희들끼리 보내게 한다.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죽이고 먹어 치워버려도 어미는 상관하지 않는다. 밀림의 왕자 사자는 강인한 종족 번식을 위해 새끼들을 일부러 낭떠러지로 떨어트린다고 한다. 물론 강하게 키운다는 말이지 실제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최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뭔가 남다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로 회자되는 말들이다.

자녀 모두가 소중하다며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고 말하지만 더 소중히 여기는 손가락이 없는 건 아니다. 최고를 상징하는 엄지가 있는가 하면 꼬래비를 상징하는 새끼손가락도 있다. 입으로는 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식마다 용도가 다르고, 기대하는 것도 다르다.

손가락의 용도가 제각각이듯 사회나 국가에서 자식들의 쓰임도 같을 수 없다. 특히 대권을 이어야 할 왕가의 경우가 그렇다. 왕자는 여럿이어도 왕은 한 사람이 맡아야 한다. 아무리 아들이 많아도 한 사람만 선택받을 수 있다. 여기서 열 손가락 모두 소중하다는 말은 무의미해진다. 오로지 엄지로서 한 아들만 소중하고 나머지는 조용히 있든지 아니면 죽어줘야 한다. 이것이 왕가의 운명이자 비극이다.

요즘 한창 ‘태종 이방원’이 방영되고 있다. 왕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생사고락을 같이한 본처 소생들이야말로 끈끈한 부자지간이자 동지들이다. 아들들도 아버지의 큰 뜻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으니 효자의 도리를 다한 셈이다. 아무나 이룰 수 없는 대업을 이뤘으니 아버지의 사랑, 곧 논공행상에 대한 기대가 없을 수 없다. 보통은 부자자효(父慈子孝), 부모의 사랑에 따른 자녀들의 효를 말하지만 여기서는 자효부자(子孝父慈), 자녀들이 아버지 위해 싸웠으니 아버지가 자녀 위해 사랑을 베풀 차례다. 그런데 정작 앞장섰던 본처 소생들은 소외되고 대업 이후 낳은 왕자들이 그 사랑을 독차지했다. 차린 자와 누리는 자가 달랐던 것이다. 당연히 차린 밥상을 대할 줄 알았던 전처 소생들의 반란이 시작됐고 그것이 두 차례에 걸친 비극, 왕자의 반란이다. 마치 독수리 새끼들이 절벽 낭떠러지에서 서로 차지하려고 밀치는 형국이다.

여기서 아내들의 내조가 빛났다. 아버지 이성계의 아내 강 씨도, 아들 이방원의 아내 민 씨도 뛰어난 지혜와 용기로 남편들을 다독였다. 전처소생을 물리치고 자신의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주도록 한 것도 여성(이성계 아내)이고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도록 분위기를 독려한 것도 여성(아방원 아내)이다. 두 여성이 사랑과 배신, 효와 불효의 사이를 오가며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절묘한 심리를 이용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베푼 것은 사랑이지만 전처 소생들에게는 배신이었다. 시아버지를 돕게 한 것은 효였지만 시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게 한 것은 불효였다. 이 때 절묘한 심리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부자간의 특별한 정리를 말한다. 효가 사랑을 이길 수 없다는 논리다. 이성계도 이방원도 여기에 무너졌다. 아버지의 뜻이기에 따라야 하는 게 자식의 당연한 도리이지만 이는 잠깐이고 오히려 그에 반하는 불효가 대종을 이뤘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을 차마 내치지 못했다. 효보다 사랑이 컸다. 이성계는 몇 차례 자신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한 이방원을 내칠 기회가 있었지만 그걸 못했다. 이를 간파한 이방원의 처 민씨는 시아버지 이성계를 농락했고 결국 자신의 남편 이방원도 농락했다. 내쳐진 친정 복원에 맏아들로 세자가 된 양녕대군을 활용했고 양녕대군은 아버지 이방원이 할아버지 이성계에 했던 방식대로 저항하며 대들었다. 뜻밖의 저항에 부딪힌 이방원은 그간 아버지 이성계에 했던 자신의 불효를 돌아보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자책했다. 효와 사랑, 무엇이 큰가를 확인시켜주는 명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