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균 한국효문화진흥원 효문화연구단장

효(孝)란 글자는 생활능력이 없는 노인(老)을 젊은 자녀(子)가 짊어지고 있는 형상이다. 한마디로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모습이다. 강자의 약자 보호가 효라면, 효는 매우 합리적이다. 전통사회에서도 확인가능하다.
한창 젊어서 조정에 나아가 일하다가 부모가 나이 들어 홀로 거동할 수 없게 될 때쯤 부모 돌봄을 위한 사직 상소를 올렸다. 왕조실록에 전하는 이런 부모 돌봄 사례는 매우 많다. 임금도 그런 관리의 뜻을 존중했고, 때론 고향 근처 지방직으로 발령 내어 부모 돌봄을 배려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강자의 약자 보호기능은 사라져갔다. 약자가 강자에게 헌신 봉사 희생하는 것을 효라 여기며 가르쳤다. 어린 아이와 나약한 여성들이 그 희생의 중심에 섰다. 효행기록을 담은 수많은 자료에는 한창 어린나이의 청소년들과 어린 나이에 시집온 여인들의 헌신적인 희생 사례가 수두룩하게 실렸다.
한국의 대표 효행설화 심청전도 같은 맥락이다. 보호받아야할 청소년들이 효란 명분하에 희생되는 모습들이다. 강자의 약자 보호 기능이 약자의 강자 보호기제로 바뀐 것이다. 효개념의 완전 변질이자 왜곡이다.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브로커’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출산한 아이를 버리려다 생긴 일들을 소재로 삼은 영화다. 내용 속 어른, 아이 대부분 버려진 추억과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중심 무대도 고아원이다. 버려진 아이는 인신매매범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낳은 정이 빛났다. 애를 다시 찾으려는 엄마의 모성본능이 이야기를 반전시켰다. 애를 손에 넣은 매매범들이 버릴 거면 왜 낳았느냐 꾸짖자 “뱃속 애는 죽여도 되고 낳아서 버리면 안 되냐”며 오히려 엄마가 반문했다. 오늘날 모두가 심각하게 반성하며 돌아보아야 할 내용이다.
약자 아이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부모나 어른들의 그때그때 편의에 따른 선택만을 기다린다. 간간이 보이는 아이의 옹알이와 미소, 그리고 울음소리만이 존재감을 표현할 뿐이다. 그 때마다 아이의 무게감은 주연배우 못지않다. 고아원에서 함께 따라나선 아이 역시도 버려진 아이다. 좀 자란 철부지 어린아이도 아직은 사랑받을 존재이지 누구를 위할만한 입장이 아니다. 약자중의 약자일 뿐이다. 강자의 약자보호가 효라고 했다.
그러므로 약자인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소 짓고 옹알이하는 것 말고는 별로 없다. 그래도 태어난 것만으로도 기쁨, 행복을 전해준다면 그것으로 넉넉히 효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라면서 나이에 걸맞게 행동하면 효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부모와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할 대상이지 누구를 위해 헌신 봉사 희생할 존재는 아니다. 부모 위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상당수가 효의 본래 취지에서 어긋난다. 영화 ‘브로커’는 아기를 버리려다 모성본능이 작동하며 다시 찾아온 엄마의 안타까운 마음이 곳곳에 서렸다.
키울 자신도 없고, 여건도 아니지만 좋은 가정에서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모정의 마지막 바람이 담겼다. 처음에는 버렸고, 다음엔 돈벌이 대상이 되었지만, 모성본능, 자애본능이 발동하면서 아이가 좋은 환경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영됐다. 약자 아이를 향한 강자 어른들의 배려하는 마음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자신들도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고 컸기 때문에 어느 게 최적이고 최선인지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들이다. 이제 버려진 아이의 정착할 곳이 정해졌다.
아이를 돌볼 양부모는 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바라보며 “아이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지켜진 아이”라고 말하며 강자들의 책무에 감사의 예를 표했다. 아이를 맡길 수밖에 없었던 친모는 “태어나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됐다. 어린아이는 보호받아야 할 약자이고 어른들은 어린이를 보호해야할 강자다. 어린아이가 커서 강자가 될 때면 어린이를 보호했던 어른은 약자가 되어 강자의 보호를 받게 된다. 결국 효란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