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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칼럼] 효는 효다

dukkyun 2022. 7. 14. 09:45

김덕균 한국효문화진흥원 효문화연구단장

현대적 효 개념 정립 요청이 뜨겁다. 원래 효는 젊은 자녀가 늙은 부모를 짊어지고 있는 형상에서 비롯됐다. 생활능력이 없는 늙으신 부모 봉양을 효라고 했다면 효는 약자(노부모)에 대한 강자(젊은 자녀)의 정신·물질적 부양과 공경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효의 본질과 개념이 나왔다. 하지만 시대마다 다른 부양과 공경의 방법적 차이가 생겼다. 물에 비유하자면 샘물이 흘러 냇물이 되고 냇물이 흘러 강물이 되는 이치이다. 비록 시공을 달리하며 흐르다 새로운 것들이 추가되지만 물의 기본 성분은 그대로 유지된다. 만일 물의 본래 성분이 사라지고 변했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된다. 메주의 원료는 콩이지만 메주를 콩이라 하지 않는다. 메주로 간장과 된장을 담지만 메주를 간장 혹은 된장이라 하지 않는다. 물로 술을 만든다 해도 물을 술이라 하지 않는다. 본래성이 변했기 때문이다. 효도 마찬가지다. 다른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혹 효의 본질이 변질됐다면 효가 아니다. 효와 충을 실례로 살펴보자. 역사 속에서 효와 충은 유사개념으로 말해 왔다. 하지만 둘은 다르다. 효는 바꿀 수 없는 천륜관계의 도덕적 요청이고 충은 가변적 인륜관계의 정치적 요청이다. 그런데도 둘을 오인했다. 오인보다는 유도했다. 불변적인 효를 가변적인 충에 갖다 붙여 왕조사회의 정치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부자관계의 근본은 친함[親]이고 군신관계의 근본은 바름[義]이다. 부자의 친함은 불가역적 천륜이지만 군신관계의 바름은 불의(不義)하면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가변성이 있다. 효의 대상은 하나여도 충의 대상은 여럿일 수 있다.

그럼에도 둘을 같이 말한 건 영속적 정권 유지를 위한 군주사회의 요청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절대 군주에 대한 충성 복종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이후 효는 수직적 왕조사회에서 강력한 정치질서의 안정적 기반으로 자리했다. 강자의 약자 보호가 아닌 약자의 강자 섬김이 되면서 효의 본질은 바뀐 듯 보였다. 또 그것이 통했고 당대 사회가 용인하고 이용했다. 이런 효의 변질은 효를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가 요구했던 하나의 방법일 뿐 본질의 전도는 아니다. 효의 본래 의미가 희석되고 순종과 복종의 방법적 요소가 강조되면서 마치 본질이 변한 것처럼 오해되지만 본래 효 개념의 변화는 아니다. 근현대사회에 효가 멀어지고 비판된 건 결국 본질이 아닌 효 실천 방법의 일시적인 변질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적 효개념 재정립의 필요성을 말하며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효 개념의 재정립이 아닌 효 실천 방법의 재정립이다. 이미 말했듯 효 개념이 달라지면 그것은 더 이상 효가 아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효 개념이라며 배려, 존중, 사랑, 공경, 칭찬, 하모니 등등을 말한다. 모두가 소중하고 필요한 것들이면서 설득력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효 실천 방법의 하나일 뿐 효 개념이 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효를 칭찬이라 한다면 칭찬은 효다’란 것도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성립 불가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효 실천 방법을 개념으로 오인하면 안 될 이유다.

다음은 실천 방법의 차이에 따른 편견 배제다. 우리 사회는 다문화, 다종교사회다. 단일민족도 옛날얘기가 됐으니 다민족 사회라 해도 틀리지 않다. 다행히 효는 종교, 문화, 민족(인종)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다. 동서양은 물론 유교, 불교, 기독교가 따로 없다. 방법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개념은 다르지 않다. 따라서 방법적 차이로 인한 상호 비방은 곤란하다. 편중된 사고로 다른 종교, 문화, 민족의 효를 폄훼하거나 비판은 삼가야 한다. 구한말 오랑캐로 치부하던 서양 선교사가 고향에 계신 부모에게 편지 쓰는 것을 보고는 저들도 효를 아는 문명적 인간임을 인식했듯 모두가 공감하는 효문화 진작을 통해 이 사회가 상호 존중 배려하는 화해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금강일보 admin@ggilbo.com